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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벗어난 자유로운 의식의 항해 (2007)

 

신항섭(미술평론가)

예술의 경우 장르가 무엇이든지 10년 정도는 계속해야 그 성과가 나타난다. 창작이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거기에 스스로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능이 숙련되고 또 세련됨으로써 비로소 미적 가치, 즉 예술성이 형성되기에 그렇다. 따라서 다재다능하기보다는 우직하게 외길로 정진하는 노력형의 인간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그러기에 미술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더라도 그 존재성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창작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을 숙달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성순희는 다양한 소재를 하나의 화면에 자유롭게 배치하는 방식의 ‘실내정경’이라는 독특한 그림으로 20여년 가까이 지속해 왔다. 그러는 동안에 서서히 그림이 그 자신의 존재감을 만들어 놓았다. 다시 말해 어디에서건 그의 그림을 보면 ‘성순희’라는 작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일정한 패턴의 작업을 지속함으로써 작품적인 완성도를 높여갈 수 있었고, 그리하여 작품은 이제 그 자신에게 작가적인 존재감을 부여하는 식으로 보답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작품에 기울인 노력과 정성 그리고 열정으로 말미암아 작품에게 확실한 주인의식을 심어준 결과이다. 그렇다. 작품적인 완성도가 높고 또 예술성을 지닌 작품은 주인을 잘 섬기게 마련이다.

 

그의 작업은 ‘실내정경’이라는 제한된 소재 및 공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거기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적인 상상의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실내정경이라는 증거는 바깥풍경이 아닌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에 놓인 사물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소재의 다양성이라든가, 현실적인 공간감을 떠난 자유자재한 사물의 존재방식은 시야를 끝없이 넓혀준다. 작품에 따라서는 실내라는 한정된 공간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우주적인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여기에서 우주의 이미지는 우주색으로 상징되는 청색 또는 회색조를 배경색으로 설정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실내공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공간적인 규정이라기보다는 소재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즉, 일상적인 생활기물인 탁자 의자 컵 꽃병 접시 책 인형 촛불 과일 모자 따위가 이합집산하면서 하나의 작품을 구성한다. 소재의 구성으로만 보면 실내정경이 틀림없다. 적어도 실내를 벗어난 옥외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 소재는 일반적인 정물화와는 달리 일정한 존재방식이 없다.

일상적인 실내공간이라면 바닥과 벽 천장 문 따위가 있기 마련이고, 정물은 상하전후좌우라는 존재방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는 이와 같은 실내의 조건 및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구속력도 없고 소재 또한 자유롭게 배치된다. 그러고 보면 소재들이 화면에 거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소재들이 밀집한 상태도 아니다. 이런 소재 배치 또는 구성은 확실히 일반성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소재인 사물들은 대체적으로 형태가 명확하지 않다. 소재에 따라서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표현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이미지로 처리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형태가 지워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소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즉 배경과 선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소재와 배경이 서로 맞물려 들어가는 까닭이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소재와 배경이 일체가 되는 형국이다. 그런데다가 배경은 현실적인 공간감이 없다. 실내라는 약속된 공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소재를 감싸는 배경은 차라리 무한한 우주적인 이미지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비표현적인 공간이면서도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라, 우주처럼 별을 포용하는, 살아 움직이는 공간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소재들이 일정한 조형적인 약속이 없이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끝없이 확장되는 우주공간의 이미지를 도입한 결과가 아닐까.

 

이와 같은 공간개념을 배경으로 하는 소재들의 형태는 단순화되거나 부분적인 생략 등의 기법으로 거칠게 다루어진다. 아무리 예쁘고 반듯하게 보이는 소재일지라도 구체적인 형태를 잃고 만다. 다만 빠르게 전개되는 붓질과 물감의 거친 질감으로 요약되는 표현주의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형태미를 약화시키는 듯싶은 인상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사물의 형태묘사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물 고유의 형태에서 느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현실적인 아름다움과 회화적인 아름다움, 즉 자연미와 조형적인 해석이 가미된 인위적인 미가 어떻게 다른지 확인시키려는 입장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소재가 놓이는 방식에는 어떤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인 정물화나 실내정경에서 적용되는 구도 및 구성에서 나타나는 질서를 무시하는 듯싶다. 그리하여 작품에 따라서는 전혀 연관성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소재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일정한 존재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데도 불협화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소재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형태미, 즉 독립적인 존재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형태를 불명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소재의 존재감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작업은 옛 유물 발굴현장을 연상시킨다. 오랜 세월 흙에 묻혀 있다가 천천히 그 모양을 드러내는 유물은 흙과 일체가 되어 있다. 흙이 감싸고 있는 그 상황은 흙과의 한 몸처럼 보인다. 실제로 유물은 결과적으로 흙으로 되돌려진다는 점에서도 한 몸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이 그의 작업은 소재와 배경을 일치시킴으로써 일상적인 공간감을 떠나 무중력 상태의 우주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듯싶다.

접시를 캔버스의 이미지로 대체하는 작품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림 속의 접시와 그 접시 속의 그림이라는 중층의 공간개념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그 발상이 특이하다. 그런데 이처럼 접시 그림에서도 소재와 배경은 서로 유리되지 않고 일체가 된다. 물론 소품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정물의 형식을 따랐다. 소품에서는 주로 꽃을 소재로 다룸으로써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겨냥하고 있다. 이에 반해 캔버스가 커지면 다양한 소재들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는 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롭게 공간을 유영한다. 둥근 형태의 접시 모양은 그 자체가 소우주를 연상시키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접시라는 특정의 이미지, 그 틀을 깨고 궁륭의 이미지에 근접하는 것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일반적인 정물의 구성을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더라도 탁자 또는 바닥에 정물이 놓이는 방식과는 다른 공간 구성을 지향한다. 그래서 어떤 형식이 되더라도 그의 작품은 그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는 개별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을 확립했음을 의미한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어디에서나 작품을 보는 순간 그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것으로써 개별적인 형식미가 구현되는 것이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은 그 어떤 소재 및 구성의 작품일지라도 그 자신만의 형식미로 변환하는 힘과 설득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공간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전통회화인 민화에서 착상한 ‘책거리’ 이미지를 소재로 한 작업이 그렇다. 책거리는 문방사우를 중심으로 한 선비들의 책장 또는 장식장을 소재로 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민화의 표현양식이 갖고 있는 독특한 조형성을 실현하고 있다. 시점이동 또는 원근법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경직된 구조는 ‘책거리’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책거리’ 그림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더불어 경직된 평면적인 구성이 되레 해학적인 이미지를 야기한다. 엄격한 기하학적인 구조의 경직된 이미지인데도 심각하거나 따분하지 않다. 다양한 소재의 배치 및 구성, 그리고 소실점을 갖지 않는 태연한 조형어법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파격이다. 이러한 의외성은 미적 쾌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는 ‘책거리’ 그림을 현실공간으로 끌어들여 평면적인 이미지에서 입체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놓고 있다. 따라서 민화 속에서 잠자고 있던 옛 시간이 불현듯 깨어나 우리의 현실적인 생활공간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고 있다는 기분이다. 평면적인 구성에서 단지 입체적인 공간감을 만들어놓음으로써 과거가 현실이 되는 기막힌 반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책거리’ 그림 역시 민화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이 부실하다. 소실점이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그 어떤 그림보다도 생생한 현실감이 묻어난다.

그의‘책거리’ 그림이 오늘우리들 실내공간에 놓여 있는 장식장을 재현한 사실주의 그림보다 한층 생동감이 강한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기존의 조형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민화만의 독자적인 형식미에 있지 않을까. 간결하면서도 힘찬 구성 및 구도가 만들어내는 명료한 이미지, 즉 원근법을 의식하지 않는 대담한 평면적인 구조를 원용한데서 그 비밀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든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통합하는 그의 ‘책거리’ 그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창의적인 그림이 가져다주는 미적 쾌감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지 모른다. 그의 ‘책거리’ 그림은 전통회화의 금맥인 민화에서 찾아낸 현대적인 해석의 새로운 형식미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그의 그림은 실내공간이라는 한정된 상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닫힌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시각적인 자유를 만끽한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현적인 이미지 및 공간개념은 열린 시각 및 자유로운 미의식과 미적 감각의 소산이다. 어쩌면 닫힌 공간일 수밖에 없는 현대 도시인의 삶의 공간이 주는 단절과 소외감을 벗어나 무한한 심적인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몇 가지 특징적인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은 시각적인 개방감과 더불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제공한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사물의 존재방식과 사실적인 형태미에 얽매이지 않는 감성적인 표현을 통해 자유로운 항해를 꿈꾸는 예술가의 맑은 영혼을 투시할 수 있다. 그 맑은 영혼은 메마른 현대인의 감정조차 거뜬히 감염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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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에 의한 '캔버스 속의 이중공간' (2000)

신항섭(미술평론가)

생각을 바는 것만으로 세상은 이제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누구보다도 새로운 표현을 꿈꾸는 예술가야말로 생각, 아니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각의 전환이란 세상을 보는 방식, 즉 세상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에 의한 지식의 울타리, 다시 말해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시각예술을 다루는 화가의 경우 새로운 조형의 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기존의 미학에 집착하거나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에 얽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순희의 최근 작업은 이전의 실내정경과는 사뭇 다른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발상을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형식과 만나고 있다. 일상적인 시각에서 탈피함으로써 비롯한 조형의 묘미를 터득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형, 즉 형태를 만든다는 것은 화가에게는 아주 간단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화가가 형태를 만든다는 의미는 '창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창작'이라는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형태를 만들어야 하므로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실의 재현을 뛰어넘는 작가적인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 상상력은 역시 일상적인 시각을 벗어나는 치열한 작가의식으로부터 열린다.

그는 오래동안 '실내정경'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정물화에 가까운 작업을 해왔다. 그 자신의 생활공간 및 작업공간에 놓인 소재들을 실재와는 관계없이 자유롭게 배치하는가 하면 형태의 재해석을 통해 비정상적인 회화공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아우러 빛과 어둠이 일상적이 실내공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정서적인 변화를 주시하면서 사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포착하고자 했다. 물론 빛에 의해 일어나는 정서적인 변화는 그 자신의 사유의 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빛의 이미지에 점령당하는 실내공간이 아닌 작가적인 상상력이 조합해 내는 추상적인 빛의 공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에서는 꽃 나비 화병 탁자 의자 등이 등장하는데 현실공간이 요구하는 일정한 방식이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배치에서 시각적인 개방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빛에 의해 일어나는 눈부심과 착란 등 시각적인 현상을 형태해석의 방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비하고도 모호한 이미지를 찾아내고자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호함은 이미지의 불명확성을 의미한다. 강력한 빛은 형태의 윤곽선뿐만 아니라 명암효과를 감소시키기도 한다. 그의 실내정경은 이렇듯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모호함을 중요시한다. 감상자의 상상력으로 그 모호함을 능히 거두어 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최근 작업은 어떤가. 먼저 실내에 한정해온 시각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 하나의 변화이다. 그리고 종이 상자 또는 나무상자의 이미지를 실내공간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통해 정물이 놓여있는 상황변화에 따른 의식의 변전이라는 미적 쾌감을 맛보게 한다. 뿐만아니라 대형접시를 캔버스에 끌어들여 그 안에다 또 다른 독립적인 회화공간을 성립시키고 있다.

이처럼 세 가지 형태의 새로운 작업은 조형적인 상상력의 확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형식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는 사물 및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조형의 기쁨과 만나고자 한다.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어차피 양식과 형식은 공유되기 마련이다. 형식의 새로움에 집착하기 보다는 독자적인 조형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는 독자적인 조형성에 대한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형식은 앞으로 전개 그의 작업에서 조형성과 함께 내용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세 가지 유형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바깥으로의 이동, 즉 시선을 실내에서 실외로 옮기고 있는 작업이다. 이는 소재의 변화와 함께 형식의 새로움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실내에 놓여있는 생활용품 및 그와 관련된 소재에서 배 우산 물고기 등으로 바뀌고 있다. 아울러 이들 소재는 실내정경의 자유로운 배치방식과는 달리 일정한 조형적인 질서를 따르고 있다. 연속무늬처럼 유사한 이미지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처럼 배 우산 물고기 등의 소재를 일정하고도 연속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시각적인 권태로움을 유도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복적인 형태에서 비롯되는 리듬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 리듬은 주제의식을 강조하는데 효과적이다. 이와 함께 특정소재를 연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배열할 때 이미지의 통일성이 돋보인다. 이미지의 통일성은 결과적으로 의식의 투명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전의 실내정경이 주는 신비하고도 모호한 인상과는 다른, 주제의 선명함이라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시선을 실내에서 바깥으로 옮겼다고 해서 단순히 정물에서 풍경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여지는 사실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 의식의 시각화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소재는 미의식 및 미적 감정이 점유하고 있는 그 자신의 내면세계를 히는데 필요한 조형적인 열쇠인 것이다. 그가 일련의 소재반복이라는 형식의 작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현대사회의 무미건조함이다. 물론 조형 및 정서적인 문제에서는 실내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과 사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신비함 및 모호함에도 시건을 고정시키고 있다.

종이상자 및 나무상자의 이미지를 실내공간으로 전환하는 방식의 작업을 보자. 이와 같은 형식의 작업은 갇힌 공간으로서의 실내는 물건을 넣어두기 위한 닫힌 공간으로서의 상자와 다르지 않다는 평범한 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캔버스라는 평면공간에 실내공간과 상자를 동일한 개념으로 놓았을 때 전혀 다른 반전현상이 일어난다.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상자는 물건을 넣어두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기거하는 실내처럼 보이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꽃이라든가 인형 따위의 소품이 들어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실내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곳에 놓인 소품들은 의인화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꽃이라든가 인형 따위의 소품은 실내공간에 놓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내정경을 표현한 작업에서 느껴지는 소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왜 그렇까.

실내정경을 묘사하는 작업에서는 소품들이 실내에 놓여있는 소재들이기에 실내공간이라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반면에 종이상자 및 나무상자의 이미지를 화면속으로 그대로 끌어들이는 작업에서는 그 전체적인 이미지가 실내와 유사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의식화된 실내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러므로 조그만 꽃병이나 인형 따위가 사람의 모양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렇듯 시각적인 착란은 상자속에 놓여있는 소재들이나 실재의 실내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의 비례가 거의 같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시각적인 변천이야말로 조형의 요술이자 묘미이다.

접시를 하나의 조형공간으로 전환하는 작업 또한 의식의 반전이라는 미적 쾌감을 제공한다. 종이 및 나무상자 이미지를 이용한 작업에서와 다름없이 접시라는 음식을 담는 그릇을 캔버스와 같은 개념의 조형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음식이 놓여 있어야 할 접시에 인형이나 꽃 따위의 소재들이 들어섬으로써 시각적인 충격을 분다. 접시에 들어서는 인형 꽃 등의 이미지는 접시그림  형태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장식성을 부여하기 위한 무늬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접시 자체를 캔버스 같은 개념의 조형공간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캔버스 속의 접시 그림과 그 접시 속의 또 다른 그림이라는 이중구조의 조형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음식을 담은 그릇이라는 실용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회화적인 조형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접시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 접시속에 전개되는 정경은 상자속의 정경과 유사한 시각적인 체험을 유도한다. 접시그림의 캔버스의 경우처럼 접시라는 평면성을 탈피하여 실제적인 공간으로 이행하는 까닭이다. 거기에 꽃이 존재하고 인형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존재방식이 흡사 현실공간의 인간과 유사하다. 즉 꽃이나 인형의 의인화가 이루어지는데 연유한다.

이들 새로운 세 가지 형식은 놀랍게도 한꺼번에 왔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 형식이 서로 다른 조형개념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이전의 '실내정경'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실내정경'이 바깥풍경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조형적인 해석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또한 종이상자 및 나무상자의 이미즈를 실내공간으로 대체한 것도 따지고 보면 '실내정경'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실내공간을 상징하는 상자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제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현실과 유사한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는데 대한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이란 결과적으로 세상에 대한 화가의 개인적인 해석이다. 여기에는 물론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동을 생산해내야 한다는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가 만나고 있는 최근의 작업은 형식의 새로움보다는 조형적인 해석에서 개별성을 추구함으로써 그 의미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작업에서는 색채의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밝고 화사한 색채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이전의 "실내정경'과는 달리 갈색, 군청색, 검정색 등 대체로 무겁고 어두운 색채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색의 변화는 형식의 새로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인 셈이지만 그의 의식세계가 보다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도 좋다. 더불어 마티엘도 두터지고 있디. 가령 접시그림의 경우 가장자리의 무를 거의 부조에 가까울 정도로 두텁게 물감을 덧입힘으로써 실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접시의 이미지가 캔버스로 부터 독립된 별개의 공간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캔버스속의 접시라는 인식을 부수고 접시가 만들어 내는 별도의 공간으로 곧바로 들어오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무튼 그는 새로운 형식의 작업을 통해 조형적인 상상력을 거듭 확장하고 있다. 그는 마침내 창작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우치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그는 이처럼 의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일상적인 시각을 벗어남으로써 상자 및 접시라는 공예품이 갑자기 현실과 유사한 공간으로 바뀌는 조형의 요술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설령 이러한 조형적인 상상력에 닿아있었다고 할지라도 대다수의 작가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자기확신이 없는 탓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가파른 변화의 물살을 타고 있기에 어떠한 방향으로 전진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항해가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늘 최근 작업을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성과이다. 그는 이제 발상의 신선함을 독자적인 형식미로 완결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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