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도시감각과 원시적 자영주의의 중용적 표현
이영재(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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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순희의 작품세계는 평범한 가운데에 매우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이 작가의 그림들을 보면 담백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현란한 색채들이 주는 이미지들로 현대인의 이율배반적인 정서를 투영하고 있다. 대중적 소비사회의 화려한 물결 속에서 현대인들은 여러가지의 상이한 문화와 습관 그리고 상이한 의식들의 공간 속에 살고 있다. 그와 같은 복잡한 구주의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조화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의 쳇바퀴 도는 삶의 패턴에서 현대인들은 은연 중에 원시적인 자연주의를 동경하게 되고 꿈이나 신화세계의 신비로운 체험을 바라게 되기도 한다.
성순희의 그림에서는 바로 이 현대 도시인들의 잃어버린 원초적 노스틸지어의 감정이 작품에 투영되고 있다. 약간은 퇴색한 듯한 색감들이 주는 뉘앙스는 한편으로는 현대적인 체취를 풍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득한 신화시대의 전설이나 소박한 자연주의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킨다. 한 마디로 이 작가의 그림들은 도시인들이면 대다수가 가질 수 있는 여러가지 혼재된 파노라마처럼 화면에 전개된다. 그것은 우리사회가 급작스럽게 도시화되면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추억이 심상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 내부에 본래적으로 잠재해 있는 원시성에의 회귀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2. 이 작가에게서 드러나는 형상의 세계를 음미해 보면 아마도 동양의 잔통적인 중용의 자세를 엿불 수 있지 않는가 여겨진다. 우리 동양인들에게 중용의 자세는 미술에서도 역시 예외없이 요구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미술 역시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역사나 전통으로부터 파생된 의식의 형상적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시각의 캔버스 내에는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듯 하지만 거기에는 무수히 다른 수많은 의식과 사조들이 점철되어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화가들의 역사나 사회의식 또는 극히 내면적이고 원초적 잠재의식 등을 엿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들 여러 속성들은 다양성과 통일성의 이질적 리듬 속에 중용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이 오래동안 요구되어 왔다. 성순희의 그림에서는 그와 같은 속성들이 현대성과 원시성이라는 상이한 정서의 공존 속에 중용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화면에 나타난다.
이러한 중용적 태도는 이 작가의 일상생활의 태도로부터 나타나기도 한다. 성순희의 그림들은 일상생활과의 조화 속에 설화나 자연에 대한 복잡한 관념을 노래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작가에게서 그림은 일상생활의 구조적이고 딱딱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해방적인 공간으로서 유기적인 공간을 심어주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가의 그림에서는 은연중에 일상과 예술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듯 하다. 이 작가에게 있어서 그림은 그와 같은 일상생활의 연장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노래가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순희는 오늘날 난무하고 있는 미술세계의 어떤 특정 도그마나 사조에 교조적으로 집착되지는 않는다. 도그마나 사조의 특징은 특정시대의 상황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안티테제 속에 결핍된 요소들을 극도로 과장함으로써 변증법적으로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 따라서 도그마는 강력하고 힘찬 요소들을 지니면서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역시 또다른 간과된 약점들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 처방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에 있어서도 우리는 실제세계와 도그마와의 괴리로부터 오는 빈 공간을 매꿀 수 있는 동양적 지혜가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성순희의 그림에서는 현상에 있어서 어떤 원리나 도그마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정서를 지극히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표출해 내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가에게는 간혹 나름의 여러가지 특징들이 절충주의적 요소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그림에 대한 그녀 자신의 규칙에 구속되기 보다는 그것을 벗어나서 내적인 주관을 여과없이 표현하는데서 오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순희의 작품들은 어떤 일관된 규칙에 집착하고자 하지 않는 흔적이 보인다. 그 때문에 이 작가의 그림들은 한편으로는 평범하게 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 이 작가의 특징은 미술에서 어떤 도그마나 사조에 탐닉하지 않음으로써 생의 복합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비교적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한편으로 새나 나무 등의 자연적 대상물들이 등장하면서도 그것들을 설명적이거나 객관적 자연을 탐닉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면적으로 걸러져서 매우 주관적이며 보다 추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작가의 그림에서 지난 시대에 풍미했던 여러 사조들이나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미술의 양식은 절충주의적으로 채택은 되어도 교조적으로 집착하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3. 성순희가 그려내는 화면들은 일반적으로 두터운 깊이를 갖는 물감이 주조를 이룬다. 이따금 씩 아크릴 등에 의한 얇은 번짐의 효과가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극히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나타나서 이 작가의 일반적 성향을 말해주지는 않은 듯하다. 그와 같은 두터움은 대개가 여러 번에 걸친 덧칠로부터 형성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두터움은 초기에는 비교적 거칠고 힘차며 남성적 느낌의 형상들이 보이기도 하였지만 최근의 작품에서 매우 정제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게 된다.
간혹 어떤 작품들은 대체로 이 작가에게 있어서 화면을 전체적으로 몇 개의 거대하고 굵은 붓터치에 의해 좁게 접근되기 보다는 아기자기하게 여러 개의 면으로 분할되어 여러가지 형상들이 전체적으로 하모니를 이루게 된다. 그 속에서 색체들 역시 일관되고 단조로운 흐름을 보이기 보다는 여러가지 다른 유형의 색체들이 뭉쳐져서 현란한 하모니를 이루게 된다. 이와같이 여러 색의 한 화면에 동시적 병치는 그녀의 그림들이 사실주의적 전통보다는 표현주의적 경향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서 화면은 보다 혼란스럽게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가는 현란한 표출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전체적인 흐름을 잘 통제해 나가고 있다고 본다.
또한 성순희의 그림에서는 나름대로 프리미티비즘적 요소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은 보다 정제되고 세련된 형태로 변모되어 원래의 원시미술이 보이는 극히 간략하고 투박한 형태가 보이는 강렬한 원초적 충동은 사라져 버린다. 그럼에도 이 작가의 형상들은 나름대로 여성만의 독특한 감수성과 내면성을 보여주며 그로부터 형성되는 독특한 형상의 전개는 신선한 감각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문명의 발전에 의한 밀집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세련된 감각과 그로부터 결여된 보다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양면가치적 정서가 이 작가의 그림에서 풍겨져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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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순희의 그림은 지금까지 설명하듯 중용의 길을 걸으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요소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가의 그림을 살펴보면 당장 눈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매우 독특한 자신만의 신택스를 갖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 미술의 지금까지 관례와 상식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매우 예외적인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우선 이 작가가 그려내는 화면은 전통적이고 고전적 규범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화면에 보이는 모든 형상적 요소들은 동등한 가치가 부여되고 동일한 관점으로 묘사되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서양적 원근법이나 동양화에서 보는 것같은 근경, 중경, 원경의 어떠한 미묘한 차이도 볼 수 없다. 형상들은 어떠한 법칙이나 규범에 얽매이기 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때 그때 새로운 형상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들은 대다수의 사실주의 계열의 그림들처럼 어떤 계산된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 순간순간의 감정에 의해 어찌보면 우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한다.
다른 한편 화면의 구성에 있어서도 이 작가는 일반적인 여백과 형상 혹은 촘촘한 구성과 원만한 구성의 대비를 배제하고자 한다. 이 작가가 표현해 내는 화면은 그야말로 이들 미술에서 고전적 규범들을 철저히 넘어서서 작가 자신의 의식을 규범에 구속됨이 없이 나름대로 보이기는 한다. 그와 같은 대비는 주로 현란함과 단조로운 구성에 의해서라든가 또는 부분적인 어둠과 밝음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구성적 대비는 어떤 규칙이나 규범에도 얽매어 있지 않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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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에서 성순희가 화면을 접근하는 방식은 철저히 의식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얀 캔버스는 이 작가에게 하얀 모래사장 같아서 마치 그 위에 아무 생각없이 뛰어 노는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발자국의 자취들처럼 이 작가의 여러가지 정리되지 않은 상념들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 나가게 된다. 그러한 상념들은 때로는 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꽃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평범한 의자나 괴일 접시 등이 되기도 한다. 이들 상념화된 대상들은 우연히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전혀 우연적이라고 보기에는 이 작가의 생활과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형상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등장하는 일상적 사물들은 성순희의 화면에서는 원래의 대상성을 점차 잃게 되고 이 작가의 내면세계 속에서 걸려져서 극도의 주관화된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상들은 지워지거나 단순화되고 점차 추상화되어 우리는 대상성을 식별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이럼에도 이 작가의 그림들은 전적으로 앙포르멜이나 뜨거운 추상에서 보는 것과 같은 느낌보다는 보다 더 어떤 정형적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정형성 역시 일정한 단순함을 보여주기 보다는 주관적으로 보다 자유롭게 나타난다. 즉 이 작가가 보여주는 그림들은 형상성과 비정형성의 중간지점으로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그림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 역시 매우 중화된 느낌이다. 그것은 전율하는 느낌이나 고통 또는 엄청난 즐거움 등이라기 보다는 덤덤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요리나 생활환경 등 전통적으로 한국적인 모든 것이다. 그렇듯 성순희의 그림에서도 우리는 덤덤하고 잔잔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감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어찌 보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나 도그마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그림을 생활과 삶의 소박한 정서와 연결시키고자 하는 이 작가의 노력으로부터 기인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서 궁극적 해방을 만끽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충동을 억제하고 일정하게 현실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러한 한계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구가하려는 한 일상인으로서의 소박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